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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소년에서 총리가 되기까지

by 웅탐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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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신조
▲ 일본의 전 총재 '아베신조' (출처-중앙일보)

아베 신조의 성장기

1954년 9월 21일에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였던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와 아내 요코의 차남으로 도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동생 기시 노부오는 어릴 적 외가인 기시 가문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그런 이유로 친동생과 성이 다름) 집에서 막내로 자라게 됩니다. 본적지는 야마구치현 오쓰군(현 나가토시)이며 친할아버지는 중의원 의원 아베 간, 외할아버지는 내각총리대신 기시 노부스케로, 대 숙부는 내각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가 있었고 숙부는 일본 흥업은행의 행장을 지낸 니시무라 마사오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집안은 정치와 경제로 만들어진 일가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의 주변에는 정치가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할 만큼 누구보다 정치인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도 어린 시절에는 일본의 멋진 야구선수나 TV에 나오는 형사가 되는 것을 동경했다고 합니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야구뿐만 아니라 많은 스포츠에 관심을 가졌고 운동을 즐겼으며 영화광으로도 알려진 그는 국적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영화를 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전에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는데 상당히 수준급이었습니다.

 

그는 아는 정치인들은 그를 정치적인 면에서 상당히 다혈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이면에 상당히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대중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훗날 총리 시절 그는 많은 사람들과 SNS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며 또 한 번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베 신조의 학창 시절

그는 도쿄도에 위치한 세이케이초등학교, 세이케이중학교·고등학교를 거쳐 세이케이대학교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5학년에 걸친 1964년부터 2년간은 히라사와 카츠에이(일본의 정치가 현 자유민주당 소속)에게 과외를 받았을 정도로 교육환경이 좋았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지리 연구부 클럽에 들어가 활동을 할 정도로 지리에 대한 관심도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세이케이대학에 진학한 그는 사토 히사시(일본의 정치학자) 교수의 세미나에 소속되어 행정학을 배웠으며 운동에도 취미가 있어 양궁부에 소속되어 양궁 실력도 준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대학시절 사교성이 좋아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아주 성실했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2015년 9월에는 모교인 세이케이대학교 교수와 직원, 졸업생, 재학생들의 안보 관련 법안과 입헌주의 부정 태도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그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 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1977년 봄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헤이워드의 영어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많은 일본인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 공부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통학을 그만두고 이탈리아계 미국인 집에 하숙하면서 롱비치 어학원에 다녔습니다. 1978년에는 약 1년간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정치학의 강좌를 듣기 위해 통학을 하였는데 전공자가 아닌 탓에 학사 자격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수상으로서 방미하였을 때 추억을 떠올리며 동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베 신조의 정치 입문 

1979년 4월에 귀국한 그는 코베 제강소에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뉴욕 사무소, 가코가와 제철소, 도쿄 본사 등에서 근무했습니다. 고베 제강소에 3년간 근무한 후 그는 1982년부터 외무대신에 취임했던 아버지의 비서관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일본의 거대 광고대행사인 덴츠 그룹의 사원이었던 모리나가 제과의 사장인 마츠자키 아키오의 장녀 마츠자키 아키에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1987년 6월 9일 도쿄의 프린스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1987년 야마구치현의 참의원 의원 에지마 아쓰시의 사망으로 공석이 생기자 그는 보궐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내비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우베시의 시장을 맡고 있던 후타쓰기 히데오가 출마를 표명하면서 아베 신조의 아버지는 그의 출마를 다음 기회로 미루자며 단념하도록 설득했다고 합니다.

1991년,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2년 뒤인 아버지의 뜻 계승하고자 1993년에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야마구치 1구에 출마해  초선으로 당선이 됩니다. 당선 후에는 일찍이 아버지가 회장을 맡았던 세이와 정책 연구회에 소속되기도 하였습니다.

 

1994년 하네다 내각 시정하, 사회당의 연립 이탈을 기점으로 야당 자민당이 사회당과의 연립 정권 수립을 목표로 만든 초당파 그룹에 참가하게 되고 수반 지명 선거에서는 무라야마 토미이치에 투표해 자사 연립 정권·무라야마 내각 수립에 공헌하게 됩니다. 1995년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추천인의 한 사람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조금씩 굳히게 되었으며 1999년에는 중의원 후생위원회 이사로 취임하게 됩니다. 파벌 영수인 모리 요시로 수상이 조각한 2000년의 '제2차 모리 내각'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을 받아 내각 관방 부장관에 취임하게 되었으며 제1차 고이즈미 내각에서도 신임을 쌓은 결과로 연임하게 됩니다. 

2002년 미즈노 겐이치가 외무성 정무관 재임 중 대만 방문을 거부당해 사임했을 때도 이해하며 옹호했으며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는 '안이한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며 의연하게 대응했습니다.

 

납북자 5명의 귀국은 이뤄졌지만 이 일본인 납치 문제는 일본 측이 납득하는 방식으로 매듭짓지 못해 진통을 겪었습니다. 내각 관방 참여의 나카야마 쿄코와 함께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주장하고 납북자를 북한에 일시 귀국시키는 방침에도 나카야마와 함께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니시오카 리키는 대화 노선 등의 신중론을 주창하는 의원이 많았던 가운데 아베의 자세는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2003년 9월 중의원 해산을 앞두고 자민당 선거의 얼굴이 될 간사장인 야마자키 다쿠의 성 추문이 불거지자 고이즈미는 후임 간사장으로 아베를 발탁하게 됩니다. 각료도 당의 요직도 미경험이었던 젊은 아베의 간사장 취임은 상당히 이례적이었고 사전에 최대 부간사장 혹은 외무대신 취임이 유력했기 때문에 고이즈미의 깜짝 인사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는 간사장 시절 자민당 내에서 뿌리내리고 있던 떡값이나 얼음값 (파벌 의장이 예하의 사람에게 나눠주는 활동 자금)을 폐지하고, 자민당 후보자 공모제의 일부 도입 등 당내의 각종 제도의 개정을 실시했습니다. 2004년 4월의 사이타마 8구 보궐 선거에서는, 자민당 사상 최초의 전국적인 후보자 공모를 실시하였고 공모에 합격한 시바야마 마사히코가 당선되는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같은 해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는 목표인 51석을 밑돌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겠다며 인책 사임을 시사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49석으로 잠시 현직에 머문 뒤 결국 사임을 하게 됩니다. 같은 해 9월부터 후임 간사장의 다케베 쓰토무의 강력한 요청을 받는 형태로 당 간사장 대리에 취임하게 되는데 간사장 역임자가 간사장 대리라는 낮은 직급의 취임도 이례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많은 심임과 신뢰를 받았는 그는 2005년 10월 31일 자로 발족한 제3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미래에 새롭게 열릴 그의 정치인생을 다지게 됩니다. 그리고 2006년 9월 1일에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를 표명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의 헌법 개정, 교육 개혁, 서민 증세를 앞둔 재정 건전화, 고이즈미 정권의 성역 없는 구조 개혁에 계속 임할 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총재 선거를 준비하게 됩니다.


2006년 9월 20일 고이즈미의 임기 만료에 따른 총재 선거에서 아소 다로 외무대신과 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대신을 큰 차이로 누르고 자유민주당의 21대 총재로 선출되어 9월 26일의 임시 국회에서 제90대 내각총리대신에 지명됩니다. 그의 당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최연소 내각총리대신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은 그의 마지막

2022년 7월 8일 참의원 선거 유세중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아베 신조'. 오늘은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의 꿈 많았던 일대기 중 소년에서 총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았습니다. 화려했던 그의 일대기와는 달리 G7 국가 중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6개국의 수장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그의 장례식을 보며 무언가 공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그가 생전에 한국과의 관계를 좀 더 잘 마무리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 하루였습니다. 앞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잘 정리되어 동등하게 발전하고 상생하는 두 나라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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