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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

by 웅탐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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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한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어느 문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성취이자 기념비적인 사건
세계 모든 문자 중 가장 우수한 문자 세계의 석학들로부터 이렇게 극찬을 받은 문자

 바로 우리 한글입니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록된 한글은 자기 문자가 없는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나 솔로몬 제도에 과달카날주 말라카이족 등이 문자로 이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유네스코에서는 세계 문맹 퇴치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의 이름을 '세종대왕 상'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뜻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해 세종대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대왕
▲ 한글을 창제하신 조선의 4대왕 세종

 

어린 세종

1397년 5월 15일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훗날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이 되는 정안군과 원경왕후 민 씨 사이에서 세종은 6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참고로 세종이 태어난 5월 15일은 한글을 만든 겨레의 스승이라는 의미로 스승의 날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세종의 아명은 막동, 이름은 이두입니다. 형 양녕대군인 이제와 효령대군인 이보 말고도 위로 세 명의 형이 더 있었는데, 어린 시절 모두 요절했다고 합니다. 세종의 어린 시절 모습은 태조실록과 태종실록 등에 단편적으로만 기록이 남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린 세종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군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도는 성질이 고약해 형제들 사이에서 무시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자기가 아는 것을 잘난 체하는 것을 좋아했고 무슨 일이 생기면 쪼르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길 잘하는 고자질쟁이였다는 것입니다. 또 세종은 어렸을 때부터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었을 정도로 편식이 심했던 것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 태종이 죽기 전 유언으로 아들에게는 고기반찬을 주어라를 남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고 3년상 중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니 아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 몸이 상할 것을 염려해 남긴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효자였던 세종은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때문에 입맛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중에 신하들이 그냥 고기를 드시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재주 많은 왕자

타고난 천재성의 학구열 또한 엄청났던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로도 유명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심지어 밥을 먹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어떤 책은 100번 심지어 1000번까지도 읽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유학의 경전부터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까지 다방면으로 공부를 하고 배워가며 어린 세종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쳐가고 훗날 성군이 되는 기반을 다져나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운동은 거의 하지 않고 온종일 책만 보다 보니 시력도 점점 나빠지고 몸도 점점 허약해지자 걱정이 된 아버지 태종은 세종의 방에 있던 책들을 모두 치우게 했습니다. 어린 세종은 병풍 밑에 있던 미처 치우지 못한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끼고 살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세종은 학문뿐 아니라 음악, 미술, 수석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그건 아버지 태종이 큰아들인 양녕대군을 일찌감치 후계자로 생각해 뒀기 때문에 셋째 아들이던 세종은 형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종의 혼인

1408년 12살이 된 세종은 충녕군에 봉해졌습니다. 같은 해 심온의 딸 훗날 소헌왕후가 되는 심 씨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소헌왕후의 내조 덕분에 세종이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소헌왕후 역시 남편인 세종처럼 인성이나 성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왕이 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을 무척이나 많이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녀가 세종과 혼인을 올릴 때만 해도 세종은 왕의 자리를 잇는 왕세자가 아닌 왕의 세 번째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남편이 왕이 되고, 자신은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혹시나 처가의 입김이 세져 나중에 분란을 일으키진 않을까? 싹을 차단하는 의미에서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우게 됩니다. 그렇게 아버지 심온은 처형을 당하고 친정 식구들은 모두 관비로 전락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 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심 씨 역시 같이 패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돼 폐비는 면했다고 합니다.

 

이런 엄청난 아픔을 겪었음에도 소헌왕후는 부드럽고 온화한 성정으로 내명부의 귀감이 되었으며 세종과의 사이에서도 8 남 2녀를 둘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혼인을 올린 후 후궁을 들이지 않고 있다가 아버지 태종이 돌아가신 이후에야 후궁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총 5명의 후궁으로부터 10남 2녀를 추가로 얻어 세종은 자식만 무려 18남 4녀의 엄청난 자식 부자였습니다.

 

왕이 되다

14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 되어 충녕대군이 된 세종 앞서 얘기했다시피 태종은 큰아들인 양녕대군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무척이나 컸습니다. 태종 자신이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후임은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켜 왕통을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종의 바람과 달리 양녕대군은 자꾸만 사고를 치고 다녔습니다. 특히 여자 문제로 태종의 속을 썩이게 됩니다. 어리라는 다른 남자의 첩을 사랑해 궁으로 몰래 불러들이고 그러다 결국 임신까지 하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태종의 마음은 점점 총명한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향하게 되는데 이런 태종의 마음을 눈치챈 신하들은 세자인 양녕을 폐위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1418년 6월 결국 태종은 양녕대군을 패하고 충녕대군인 세종을 왕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그날 밤 태종은 밤새 통곡을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드디어 세종은 22살의 나이로 조선의 4대 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참고로 세종은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나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조선시대에 태어나 왕족으로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이 왕으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왕위에서 오른 지 5년째 태종이 죽고 난 다음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몇 가지 유언을 남겼는데 첫 번째가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형인 양녕을 죽이지 말라는 것과 두 번째는 양녕의 폐세자 처분을 끝내 반대하다 귀향 가 있는 황희를 중용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혹시나 나중에 불란의 씨앗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신하들은 양녕을 궁궐에서 내쫓고 귀양 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양녕을 폐위하던 밤 밤새 울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하던 세종은 대신 양녕을 경기도 이천으로 보내는 것으로 신하들과 합의를 봅니다. 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반대파인 황희를 중용하는 등 포용의 정치 배려의 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세종의 업적

국정이나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반대파라 하더라도 중용에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줄 알았던 세종은 인재들의 특성을 파악해 그들에게 맞는 직책을 맡김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를 효율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운영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국방, 과학, 음악, 예술, 문화 등 그야말로 여러 분야에서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가는데 세종의 업적이 워낙 많다 보니 몇 가지만 대략 소개하겠습니다.

 

국방 분야에서는 김종서, 최윤덕을 북방에 보내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장시켰으며 남으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과학 분야에서는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하는 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엄격한 신분 사회임에도 노비의 자식인 장영실을 중용하는 등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는 인재 등용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전문인력을 양성하게 됩니다.

 

또 세종은 조세 제도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부자는 세금을 덜 내고 가난한 사람은 오히려 세금을 더 내는 당시의 세법에 문제를 느끼고 세제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종은 조선 최초로 전 국민 찬반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5개월간의 여론조사 결과 찬성 57% 반대 43%가 나왔고 세종은 이 결과를 기반으로 보완할 점을 수정해 마침내 1444년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새로운 공법을 시행하게 됐다고 합니다.

 

아버지 태종이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면 세종은 정치부터 의례, 군사, 경제, 과학, 의학, 복지, 농사, 출판, 음악, 문학 등 모든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기며 그야말로 조선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백성을 사랑한 임금

세종은 항상 신하들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지적해 달라. 백성들이 어디가 아픈지 알려달라. 신하들이 고달파야 백성들이 편하도다.라는 말을 달고 살 정도로 항상 백성을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한 번은 세종이, 즉위한 다음 해부터 7년 동안 큰 가뭄이 이어지자 세종은 광화문 사거리에 솥을 내걸고 죽을 끓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뭄으로 인한 흉년은 끝나지 않았고 백성들은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해야 할 만큼 생활은 고달파졌습니다.

 

그러자 세종은 백성들은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만 기와지붕 밑에 편히 지낼 수 없다며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회루 옆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서 무려 2년 4개월이나 지낸 일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노비 같은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에도 관심을 두었습니다.

 

1427년 8월 24일 집현전의 응교인 권채가 자신들의 허락 없이 여종이 병든 할머니를 문병했다는 이유로 여종을 집안에 가두고 구더기가 섞인 똥과 오줌을 강제로 먹였다는 보고가 세종에게 올라오게 됩니다. 그러자 세종은 권채 부부를 형벌로 심문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노비는 비록 천민이지만 다 같이 하늘이 내린 백성이라며 아무리 개인이 소유하는 사노비라 하더라도 함부로 노비를 죽이는 것을 금지할 것을 명하기도 했습니다.

 

또 궁이나 관에서 일하는 노비 여성이 임신을 하면 만삭의 몸으로 일하지 않을 수 있도록 출산 전 미리 한 달간의 휴가를 주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몸조리를 잘할 수 있게 100일간의 출산휴가를 제정했으며 남자 노비들 역시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산모를 도울 수 있게 한 달 간의 출산휴가를 주었다고 합니다.

 

한글 창제

뭐니 뭐니 해도 세종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훈민정음 창제일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농사에 관한 책을 펴냈지만 글을 읽지 못해 책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 또 관가의 억울한 일을 고발하려면 소장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백성들은 글을 모르니 양반의 손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자꾸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접한 세종은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지금으로 치면 은밀히 한글 창제 비밀 태스크포스팀을 꾸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고 반대하거나 천 것들에게 왜 글자 같은 게 필요하냐며 많은 이들이 한글 창제에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마침내 재위 25년인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엽게 여겨 새로 28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렇게 오로지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한글은 전 세계 7000여 개의 문자 중 만든 사람과 시기를 아는 유일한 문자로 기록됐으며, 백성을 위해 글자를 창제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이며 단 24개의 글자만으로 11000개 이상의 문자와 소리를 표현해 낼 수 있는 세계 언어학자들이 꼽는 지구상 최고의 문자가 됩니다.

 

세종의 승하

세종의 업적이 쌓여 갈수록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상해 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임금이 된 이후로는 늘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시가 넘어 잠들 때까지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젊은 시절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극심한 당뇨와 두통, 이질, 수전증, 풍질 등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으며 32년의 재위 기간 중 20여 년 동안은 극심한 눈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세종실록에 실린 기록처럼 말년은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다양한 저서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맞기 3일 전까지도 정무를 보던 세종은 1450년 3월 30일  52세의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5대 왕이 된 그의 큰 아들 문종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의미로 묘호를 세종으로 정하게 됩니다.

 

애민과 위민 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 여겼던 조선 최고의 군주 세종대왕. "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는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라고 말할 만큼 국민에게 최고의 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최고의 왕이자 백성을 사랑했던 위대한 군주 세종대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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